김동환 부장 (주)리팩 포장기술사

2004년 한 해를 지나온 포장기계 업계는 여타의 제조업이 그랬던 것처럼 길고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외환 위기 때 보다 더 힘들었다고 하는 분들이 있기도 하고, 그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새해에 대한 전망이 밝지 못하다는 사실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다.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제조업의 전반적인 현상이고, 요즘 경기가 어렵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치부해 버리기는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모두 다 어렵다고 했던 지난 한 해에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하고, 기대 밖의 성장을 이루어낸 업체도 포장기계 업계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업체들이 의외로 다수가 존재하고 있음을 관심 갖고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포장기계 산업은 경기의 변동과 맥을 같이 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전반적인 국내 경기가 불황일 때 포장기계 산업은 오히려 호황을 누리기도 하고, 모두다 호황이라고 할 때 포장기계는 불황에 허덕이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포장기계라는 아이템이 소모성 제품이 아니고, 고정설비에 해당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고, 불황에서 견뎌내기 위하여 식품제조업체 등 포장기계 소비업체들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설비에 투자하는 등의 요인이 있겠지만, 아무튼 포장기계 산업의 굴곡과 경기의 호·불황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포장기계 산업 경기와 반드시 일치하진 않아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노동환경이 급변하기 이전의 제조업체에서의 설비투자 포인트는 생산량의 증대에 있었다. 즉 자동포장기계 한 대를 투입하였을 때 생산량이 얼마나 늘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포장기계를 설치하는 관점이었다.

이후 노동환경의 변화로 인한 인건비의 상승은 기업주로 하여금 설비투자의 목표를 인력대체에 두게끔 유도하였고, 이러한 현상이 포장기계 업계에는 상당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지난 1990년대의 국내 포장기계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1980년대가 우리나라 자동포장기의 태동기이었다고 본다면 ― 아이템에 따라서는 이 말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종에서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 1990년대는 성장기 또는 도약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몇몇 포장기계 업체들이 나름대로의 경쟁력을 갖추어 수입되는 기계에 대항하였고, 해외로 진출하는 업체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일본제 포장기계가 수입다변화 품목에서 해제되면 우리나라 포장기계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포장기계 업계에서 가장 두려워하였으나, 외환위기로 인한 갑작스런 개방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이 거의 없었던 것은 1990년대를 우리 포장기계 업계가 어떻게 지내왔는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1997년 말에 밀어닥친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데, 포장기계 산업도 이 변화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적지 않은 업체가 이 시기에 해체와 재편의 시련을 겪었고, 그간에 쌓아온 경쟁력에 대하여 재평가 받는 절차를 지나야만 했었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포장기계 소비자는 기계의 성능 뿐 만아니라 설비의 안정성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포장기계 제조업체로 하여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능력을 갖출 것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되었다.

설비를 제작하여 납품하는 일차적인 임무의 완수에 만족하지 않고, 그 설비가 제 역할을 다하고 현역에서 은퇴하는 순간까지 관리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포장기계 제조업체가 새로운 변신을 해야만 하였던 것이다.

ERP 시스템을 비롯한 전산화가 시도되고, ISO를 비롯한 국내외 관리기준에 자신들을 맞추어 나가면서, 오래전부터 적응해 온 GMP, 새로운 트랜드로 자리 잡은 HACCP 등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며, 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이 대략 이 때쯤일 것이다.

국내 포장기계 나아갈 길은 해외시장

국내 시장은 좁다. 특히 경기가 위축되었던 지난 한 해를 지나온 우리에게 있어서의 국내 시장은 숨이 막힌다. 반면에 세계는 넓다. 지난해에 살인적인 폭등을 한 바 있는 유가는 오일달러를 다량 확보한 새로운 소비처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고, 지리적인 잇점까지 제공하고 있는 중국시장은 우리를 조급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국산 포장기계 수준도 부분적이나마 산업선진국과 겨루어 보자고 대들어 볼만큼 성장하였다. 결국 우리 포장기계가 나아갈 길이 해외로 향하여 나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이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까지 국산 포장기계가 걸어온 길이 외국 포장기계를 흉내 내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직은 ‘이것이 한국 포장기계이다’ 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형편이다.

다량생산에 초점을 두어 고속화한 미국 포장기계와 새로운 포장 패턴에 놀라울 정도로 적응해 나가고 있는 유럽 포장기계, 그리고 얄미울 정도로 대응력이 뛰어난 일본 포장기계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우리 한국산 포장기계가 갖고 있는 장점과 특징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에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가격이 싸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우리가 선진국 기계만한 성능을 발휘하는 기계를 만들려면 그네들만큼의 제작비가 들어간다고 본다. 반대로 우리를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는 중국산 포장기계가 우리만큼의 성능을 발휘하려면 우리만큼의 제작비가 소요된다고 본다.

우리가 선진국에 대하여 또 중국이 우리에 대하여 유리한 것이 있다면 인건비 부분일 터인데, 이것은 기계제작에 저변을 이루는 인프라 부분에서 상쇄가 되어 버린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결국 기계 가격의 차이는 성능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포장기계가 이러한 벽을 여하히 넘어서서 우리만의 특징을 갖는 경쟁력 있는 기계를 만들어 내는가하는 문제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우리만의 특징 가진 경쟁력 있는 기계 만들어야

우리의 여건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기술력으로는 아직 산업선진국에 밀리는 입장이고, 뒤쫓아 오는 중국을 비롯한 후발 국가의 도전은 만만치 않다.

우리에 비하여 수 십 배 이상의 자국내 시장을 갖고 있는 중국을 보면, 앞에서 지적한 인프라의 미비 등 자신의 약점을 대량생산이라는 방법으로 커버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다. 또 우리에 비하여 상당부분 앞서 있는 기초과학 분야의 지원이 가미된다면 우리에게는 머잖아 심각한 도전으로 닥쳐올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진정한 실력자는 위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불황은 우리에게 위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위기를 반전시킬 기회가 우리 앞에 열려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