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 월드컵의 열기를 뒤로 하고 방문하였던 영국포장협회(IOP, Institute of Packaging)는 솔직히 많은 실망을 안겼다. 단지 건물외형의 크기에서가 아니라 협회가 설립된지 50년이 지난 그들도 아직 패키징분야의 mapping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정도로 정착이 되지 못하였고, 또 정부로부터의 적극적 지원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였다.

물론 그동안 이런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맵(map)이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으나, 마치 성지순례 하듯 떠났던 여행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미국의 경우 MTI/Packaging Magazine에 따르면 1999년 패키징산업은 컴퓨터와 자동차에 이어 연간 105억불 규모의 시장을 가지고 있으나 평균적인 소비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며 그 중요성에 대한 관심도 없다.

필자의 경우도 미국 유학시절 평범한 미국인 가정에 초대받고서 패키징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설명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을 기억한다. 그만큼 패키징산업은 그 정체성(self-definition)을 구축하기가 항상 어렵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패키징산업에 대한 정체성 구축은 더 요원하다. 일반인이나 산업체 종사자들의 패키징에 대한 인식은 디자인의 일부나 원가절감의 대상 정도로, 또는 환경문제의 주범으로나 여길 정도로 심각하다.

게다가 이미 물 건너간 패키징 단일단체 설립에 대한 협의는 패키징산업에 헌신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큰 짐을 지우는 일이 되었다. 업계 간의 이기와 독선의 결과로 우리나라 패키징산업 역사의 공백기로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까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산업체는 산업체대로 급격한 시대변화의 흐름을 맞고 있다. 그간 3D업종으로 인식되어온 패키징재료산업분야는 인력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 결과 공장라인의 컴팩트화, 전체 또는 부분적 자동화 생산설비 도입 등으로 급속한 환경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흐름을 타지 못한 업체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업체간의 출혈경쟁은 물론 패키징 사용업체의 막무가내식 원가절감의 제 1 요소로 부각되고 있는 실정에서 패키징에 대한 정체성 운운은 배부른 소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왜 패키징이어야 하나? 그것은 단적으로 기존에 제시된 포장이라는 명칭과 개념으로서는 패키징이 가지고 있는 미래지향적이며 신산업적인 요소를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래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어느 석사논문에서 제시된 의약품분야의 패키징직무분석을 보면 패키징직업의 영역을 디자인, 평가, 생산이 포함된 기술(technical)적 측면과 조직을 관리하고 발전시키는 경영적 측면으로 나누었다.

물론 경영적 측면은 패키징에 대한 기술적 교육수준이 높지 않아도 문제가 없으므로 굳이 패키징전공일 이유가 없다는 의견도 제시하였다. 이들의 타이틀은 Packaging manager, Manager of operations이 경력 5년에서 8년 이상, Packaging supervisor, Packaging Engineer, Packaging Engineer Associate가 경력 1년에서 3년 정도의 직위에 해당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협력업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패키징관련 문제점을 미리 파악하여 생산 전에 대비하고 또 패키징디자인을 결정하는 경영적 측면의 활동이 제품의 유통환경 파악이나 새로운 제품에 맞는 재료의 규격을 설정한다는지 하는 기술적 활동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패키징은 단순한 기술인(engineer)의 산업이나 학문이 아니다. 패키징은 순수공학이 아니라 pseudo-engineering에 가깝다. 물론 식품이나 화공 등 탄탄한 공학적 배경을 가진 전문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문적 특성상 업체든 학계든 패키징을 담당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공학처럼 1개 분야에 대해 깊은 지식을 얻기 보다는 방대한 분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패키징전문가는 기술자(engineer)라기 보다는 코디네이터(coordinator)에 더 가깝고 이것은 기존의 ‘포장’과 ‘포장인’이라는 개념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마치 과거의 ‘미장원’이나 ‘미용사’를 지금은 ‘뷰티샵’이나 ‘스타일리스트(stylist)´로 변경되어 있는 것으로 대비할 수 있다.

혹자는 그게 그거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 과거의 미장원이나 미용사는 이름만 변경된 것이 아니라 사업분야의 영역이 확대되고 서비스의 질도 향상되고 있다. 테크닉에 의존하던 산업에서 경영과 마케팅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미래지향적인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패키징은 재료이고 제품이자 마케팅이요 경영요소이다. 이것은 포장이라는 구시대적 개념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이에 매달리는 것은 현대의 초스피디한 환경변화에 대처하는 적극적인 방법이 아니다.

패키징 캠페인은 단순한 명칭변경이 아니라 관련 산업의 재도약을 위한 촉매로 여겼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현재 산업디자인브랜드과에 위치한 패키징분야가 별도 과로 독립되어야 하며 패키징 설계(design)와 환경분야에 대한 패키징산업과 종사자들의 역할이 더 커져야 한다.

또한 개별기업들 외에는 거의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패키징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또 향후 한국포장학회는 한국패키징공학회로, 한국포장협회는 한국패키징협회로, 한국포장개발연구원은 한국패키징개발연구원 등 전향적으로 개칭하여 공동발전시켜 나가는 통합적인 노력이 절실하다.

패키징분야를 좀 더 책임감 있게 발전시키기 위한 공청회라도 열어야 할 시점이다.

지난 5월 7일 패키징교육연구회라는 명칭으로 패키징학과를 개설하고 있는 4개 대학 교수들이 모임을 가졌다. 좀 더 산업체가 요구하는 현장실무형 교육에 접근시키고 패키징학을 발전시켜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하는 소박한 모임이지만 앞으로 학교와 산업의 공동발전을 위한 신선한 활력소가 되리라 믿는다.

아직도 인터넷 검색엔진에서 “패키징”이라는 단어를 입력하고 검색해보면 패키징, 또는 포장의 개념을 가진 사이트를 찾아주는 검색엔진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아직 패키징이라는 단어나 개념은 실생활에서 익숙하지 못하고 패키징을 업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어색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어색함이 얼마나 짧은 시간에 사라지느냐는 패키징인들과 패키징학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