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판지 원지 생산업체 12곳이 5년간 가격 담합을 벌이다가 천문학적인 과징금(1184억원)을 내게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3월 13일 골판지 원지 가격을 담합한 아세아제지, 신대양제지, 동일제지, 고려제지, 대양제지공업 등에 과징금 1184억원을 부과하고 각 회사를 모두 검찰에 고발한다고 밝혔다.
골판지 원지 업체들의 담합이 적발된 것은 2000년, 2004년에 이어 세 번째다. 조사 결과 골판지 원지 제조업체들은 2007년부터 2012년까지 9차례나 가격 인상을 담합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세아제지 등 대형사 4곳의 영업 임원들이 식당에서 모여 가격 인상 여부와 시기를 논의하면 사장단이 모여 구체적인 가격 인상 폭과 시기를 확정하는 식이었다.
임원과 사장들의 합의를 토대로 업체들은 골판지 원지 가격을 t당 2만원에서 많게는 9만 5000원까지 올렸다. 그 결과 골판지 상자 제조용으로 사용되는 K180 지종의 t당 가격은 2007년 초 26만∼27만원대에서 2011년말 50만원 초반대로 훌쩍 뛰었다.
업체들은 골판지 원지 가격이 하락 추세였던 2009년 상반기에는 가격 하락을 막으려고 매달 3∼5차례 조업을 단축하는 꼼수도 부렸다. 각 사가 실제 조업을 단축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국전력공사 아이디와 비밀번호까지 공유하며 전력 사용량을 점검했다.
정희은 공정위 카르텔조사과장은 “골판지 원지 시장 규모는 연간 2조원 수준인데 담합 과징금을 받은 12개사의 점유율이 80% 수준”이라면서 “이들의 담합이 심각한 경쟁 제한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아세아제지에 부과된 과징금이 318억 6400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신대양제지(217억 3800만원), 동일제지(163억 1100만원), 월산(124억 3700만원)이 뒤따랐다.
골판지 원지는 ‘원지→원단→상자’로 연결되는 골판지 산업의 시작점에 있는 품목이다. 업체들이 원지 가격을 담합하면 원단과 상자 가격도 영향을 받는다. 골판지 상자는 제품 포장, 운송에 사용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소비재 가격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정위는 골판지 원지뿐 아니라 상자업체들에 대한 담합 조사도 진행하고 있다.
이 같은 공정위 결정에 골판지 업계는 대체로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국내 골판지 산업 구조와 당시 국제 원자재 상황을 감안했을 때 가격 담합이 불가피하게 이뤄진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당시 중국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오름세를 보이면서 골판지 원지 가격 인상 요인이 발생했다"며 "원자재부터 최종 제품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룬 5개 업체가 주도하는 국내 골판지 업계 구조 아래 업체별 정보 모임 등이 활발히 이뤄지게 된 상황 역시 충분히 감안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골판지 원지 업계는 이번 과징금 처분이 최종 제품인 골판지 상자 등 포장재 업계로 확대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원자재에서 최종 제품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루고 있는 만큼 포장재 업계에 담합 과징금이 부과되면 원지 업계에도 ´2차 타격´이 불가피해져서다.
다만, 포장재 시장 규모는 원지에 비해 작기 때문에 그로 인한 여파가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앞으로는 단순 정보 교류를 위한 만남도 일절 불가능해지는 등 업체들이 무한 경쟁체제로 돌입하게 될 것"이라며 "원자재 등 원가 및 비용 절감에 적극 나서는 등 업체별 자구노력을 통해 난관을 극복해 나갈밖에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골판지 업체들이 대부분 적자로 돌아선 것으로 나타났다.
당초 택배 산업 호황으로 수혜가 예상됐지만, 수급 불균형에 따른 판매 가격 하락에 공정거래위원회의 담합 과징금까지 선반영되면서 수익성이 악화됐다는 분석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및 관련 업계에 따르면 골판지 원지업체인 아세아제지 (16,600원 상승300 1.8%)는 지난해 매출 5976억원으로 전년 대비 2.9% 하락했고 영업손실 6억원, 당기순손실 386억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동일제지 (3,545원 상승5 -0.1%)는 매출 4052억원으로 전년 대비 0.7% 증가했지만 영업손실 40억, 당기순손실 270억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삼보판지 (7,220원 상승30 -0.4%)는 매출 3024억원, 영업이익 123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0.2%, 38.8% 줄었다. 당기순손실은 324억원으로 지난해 154억원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섰다.
이들로부터 골판지 원지를 사다가 상자를 만드는 포장재 업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태림포장 (3,245원 상승55 -1.7%)공업은 매출 3503억원, 영업이익 20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0.5%, 87.3% 하락했고 당기순손실 109억원을 기록하며 적자로 전환했다.
한국수출포장공업은 매출 2306억원, 영업이익 27억원, 당기순이익 28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0.4%, 80.4% 74.2% 줄었다.
이처럼 골판지 업체들의 수익성이 일제히 악화된 것은 폐지 등 원자재 가격은 오른 반면 업체간 출혈경쟁으로 판매단가는 하락한 것이 주요인으로 꼽힌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골판지 업체들이 기존의 시장 점유율을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생산라인 증설을 지속하면서 공급이 수요를 압도하는 상황"이라며 "수급 불균형으로 업체 간 출혈경쟁이 심해지고 판매단가는 점점 하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내 골판지 원지 판매가격(3분기 기준)은 전년 대비 6% 하락했고, 같은 기간 중 골판지 상자 가격도 7%~10% 떨어졌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부과 처분에 대비해 업체들이 충당부채를 설정한 것도 지난해 수익지표 악화를 부채질한 요인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택배 산업 호황에 따른 상자 수요 증가 등의 호재로 골판지는 사양산업으로 불리는 제지업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익성이 좋은 지종으로 알려졌으나 업체 간 과당경쟁으로 이젠 옛말이 됐다"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담합 과징금까지 겹치면서 한동안 골판지 업계에 어려움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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