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지술을 처음 발명한 중국 내에서 제지술에 관한 역사적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종이의 발명은 AD 105년 중국의 채륜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채륜 이전에 종이가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며 제지의 발명 기원이 그 이전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학설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중국과학원자연과학사연구소의 반치싱(潘吉星)교수이다. 최근 방한한 반교수는 현재 채륜 이전의 종이가 여러 곳에서 출토되고 있다며 새로운 제지사를 쓰고 있다. 이번 방한에서 반교수는 ‘고고학적 발굴로 본 제지술의 기원’, ‘한·중·일 전통종이의 제조법과 특징비교’, ‘제지술의 한반도 전래’ 등의 제목으로 강원대학교,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 국민대학교, 한국펄프·종이공학회 세미나 등에서 발표하였다.
국내 제지사에 조예가 깊은 한국지기공사의 김순철 회장이 최근 방한한 반교수를 만나 중국의 제지역사, 고대 제지술의 전파 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번 대담은 10월 30일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렸으며, 반교수를 초빙한 강원대학교 제지공학과 조병묵 교수와 월간포장 김 청 발행인이 동석하였고, 연변대학교 이춘희 교수가 통역을 했다.- 편집자 주 -
김순철 : 저는 반선생을 처음 만나본 것은 1999년 연세대학교에서 개최된 「세계인쇄문화의 기원」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직접 발표할 때 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일본에서 발행한 ‘중국조지기술사’와 중국에서 쓴 여러 책들을 통해 반선생님을 몇 번 만나본 이상의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치싱 : 1999년 10월에 연세대학교에서 개최한 인쇄술에 관련한 학회에 참석하여 학회 발표만 하고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어서 감사합니다.
 | | 김순철 한국지기공사 회장 |
김순철 : 저보다도 한살 연상자이신데 이렇게 직접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반선생님은 학자로서 교수로서 연구 분야로 이렇게 걸어오시고 저술도 많이 하셨는데 저는 거의 50여 년 간 현장에서 직접 종이를 만드는 일을 해오다가 최근에야 책을 조금 만지고 있어 연구 분야에 있어서는 반선생님께 미치지 못합니다.
반치싱 : 선생님께서는 생산 일선에서 그렇게 오래 하셨으니까 사회에 대한 공헌도 저보다는 크고 생산해낸 가치도 저보다 훨씬 크다고 봅니다.
김순철 :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웃음) 그동안에는 기술서적만을 기록하다가 마지막으로 역사 쪽을 써봤는데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역사는 깊지만 전란이 계속되는 동안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소실, 약탈 되어 자료가 없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과 일본의 역사책을 많이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반치싱 : 저도 한국의 역사와 그런 역사로 인해서 중요한 문헌들이 유실되게 되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중국 사람으로서 한국 사람들에게 특별히 형제와 같은 가까운, 친근함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중국도 한국처럼 서양열강의 약탈을 받았고 동북지역 출신인 저로서는 일본의 침략도 받은 경험도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유감스러운 느낌은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김순철 : 그런데 반선생의 책을 읽어보면 쓰는 사람의 주관이 상당부분을 지배하고 나머지 부분은 참고했을 것인데,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읽어보면서 조금 지나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발표할 논문의 과제들을 읽어보니까 왕인이 일본에 간 때가 3~4세기로 되어 있던데, 그전까지는 계속해서 285년이라고 쓰셨습니다. 역사를 잘 아시는 분이 분별없이 왜 그렇게 잘못된 주장을 하셨는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역사를 구체적으로 잘 아실 텐데. 일본학자의 정설도 405년이 있는데, 그것을 계속 주장하셨는데 이번에 바꾸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 | 반치싱 중국과학원 교수 |
반치싱 : 질문 잘 해 주셨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처음에 논문을 쓸 때는 일본의 자료를 주로 사용했는데, 일본의 역사 연표를 보면 웅신천황이 있습니다. 웅신천황 연표를 전에는 285년으로 했었는데 일본에서 역사를 기만적인 방법으로 자기 역사를 앞당기기 위해 기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반성을 가져와서 다시 120년을 뒤로 미루어 놓으니까 405년을 쓰게 되었습니다. 2000년에 일본에 간적이 있는데 그 때 알게 된 사실은 2002년에 출판된 역사서에 이 사실을 시정하고 405년도 연도에 맞게 시정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순철 : 사실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은 전부터 405년이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반선생님은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하셨나 봅니다.
반치싱 : 제가 90년대 초반 논문을 쓸 때는 일본의 낡은 연표를 인용하였는데 그 때 285년으로 되어있어서 그렇게 사용하여 발표를 하였습니다. 논문 발표 후에 일본의 지인이 전화를 걸어와 ‘선생님 그것은 잘 못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지만 논문은 이미 발표 되어 있어 시정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살펴보면서 이 사실이 확실히 그렇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고치게 된 것은 이번에 한국에 오면서가 아니고 그 전부터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번에 쓰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보충 설명을 드리면, 당시에 나타났던 일식(日蝕)에 관한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이러한 것이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천문학적으로 살펴보는 역사적인 방법으로 연표를 살펴 볼 수 있는 방법이 가장 과학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봅니다. 전에 중국 사람이 한국과의 교류가 많지 못하고 일본만을 알고 있을 때 일본사람들에게 속임수를 당한 바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김순철 : 제가 생각하기에 반선생님은 중국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종이역사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혼자 책도 많이 쓰고 많은 주장을 하는데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 같습니다. 중국의 지사학회(紙史學會) 같은 데에서도 이단자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점은 어떤 점에서는 반선생님이 조금은 불행하지 않은가 생각되는데요.
반치싱 : 사실 저의 논문은 제지술 기원에 관한 것이, 가장 큰 쟁점이고 기타 논문에서도 논점이 사람들에게 반박을 받거나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은데 사실 중국 내에서 제가 고군분투하는 그런 느낌은 없고 다만 제지학계 내에서 서로 반대의 의견을 가졌던 사람들이 지금도 별로 사이도 안 좋게 지내는 분도 있지만, 지지하는 분은 역사학자, 물물학자, 고고학자 기타 업계에서 논문으로 지지를 해주고 있어 그런 느낌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가 논문의 관점을 발표할 때 반드시 과학적인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김순철 :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장하시는 것 중에 채륜 이전의 종이가 있다고 발표를 하셨는데 중국 내에서 발표에 동조자가 없으니 일본으로 건너가 학자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하셨고 이를 일본학자들이 번역해 다시 중국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중국에서의 반응이 매우 격노해 ‘반선생은 이단자’다 ‘여기에서는 동조자가 없으니 일본에 가서 원군을 구했다’하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중국의 조지학회라는 대표적인 학회가 이러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선생같이 훌륭한 교수를 조지학회에서 이렇게 물고 늘어지는지, 이러한 풍토는 고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생각되는 데요.
반치싱 : 중국학계에서 말씀하신 대로 중국의 조지학회에서 저의 견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고, 비판하고, 부정하고 이렇게 하는데요. 사실 학술계를 놓고 보면 역사학회라든가 전에부터 동조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며, 유명한 일부 역사학자들은 제 견해와 같은 견해를 인용해서 역사사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과학자나 고고학자 같은 분들은 저를 지지 하고 있으며 전체 학술계에서도 긍정과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조지학회와 이러한 알력이 생기게 된 것은 중국의 조지학회는 관헌(관료)이 만든 학회이고 그 학회에 부장, 부부장으로 계시는 분들이 외국에 가서 ‘제지기술은 채륜이 발명했습니다’라고 말들을 하고 와서 보니까 국내에서 이미 채륜이 아니다 라고 밝혀지니까 이렇게 되면 관료입장에서 난처해지니까 제지기술 학회 쪽에서는 자기가 관여하고 있으니 그 분야 언론계를 통제하기 위해서 격렬하게 부정하고 반발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 관료가 자기 권리를 이용해서 학습에 대한 간섭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김순철 : 가벼운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한국의 양지사(洋紙史) 즉 기계식으로 종이를 만드는 역사는 확실하게 몇년도에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 규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양지술이라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어떤 회사가 어디에서 맨 처음 양지를 만들었다는 것이 없습니다. 한국의 역사 배경으로 봐서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중국의 양지사를 조사해 보니 중국에서도 양지사에 대해 서로 대립해 있었습니다. 이것이 1호다 저것이 1호다 서로 대립되어 있었습니다. 대만의 진대천(陳大川)이라는 분이 쓴 책을 보면 홍콩의 대성지기창이 제1호라고 했으며 2호는 윤장(倫章)제지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중국의 양지사에서는 무엇이 정확한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반치싱 : 대륙에서 서양 기술을 도입해서 공장을 만들고 한 것이 처음으로 1895년에 상해에서 입니다. 영국에서 제지기술을 도입해서 만든 제지공장이 아까 말씀하셨던 윤장제지 공장입니다. 이 공장은 당시에 총독으로 있던 이홍장이라는 사람이 영국서 기술을 도입하여 만들었습니다. 이 공장이 대륙에서 양지를 처음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밖에 홍콩에서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김순철 : 그런데 1985년도에 중국에서 발행한 중국조지연감을 보면 제1호가 천장기록조지창이라고 나와 있던데 이것은 무엇인지요? 우리나라의 양지사는 100년 정도인데도 확실한 기록이 없어 중국의 역사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반치싱 : 이 분야에 대해 직접 구체적으로 연구해 본적은 없지만 제가 알기로는 상해에서 처음으로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되고요. 대체적으로 중국에서 생각하는 것은 19세기 말에 서양의 양지기술을 도입해 공장을 설립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 보다도 먼저 일본에서 양지를 일찍이 수입해 쓰여 졌습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 시대부터 양지를 도입해 만들었는데 이 분야에 관련해 중국의 자료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문제는 동양 3국이 합쳐서 해결해야 할 것 같군요. 저도 돌아가면 연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 청 :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된 것은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만, 종이가 발명된 이래로 양지가 아닌 전통적인 방식의 중국의 종이기술을 오늘날 어떻게 보존해 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만.
반치싱 : 그 부분에 있어서 중국은 좀 심각한 상황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기술을 보존하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그러한 무관심에 의해 고유의 기술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려 다른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공장은 원래보다 훨씬 적어지게 되고 상황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김 청 : 한국의 경우는 ‘한지’로 발전되어 제한적이더라도 쓰여지고 있고 전통고유 기술로서 보존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에는 ‘화지’로 다시 태어나 그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 전통 종이기술은 생산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업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국가적으로 어떻게 발전시켜 보존해 가느냐, 하는 문제는 세계 최초의 종이 발명국가로서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반치싱 : 중국에서는 아직 한국이나 일본처럼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보호나 지원은 아직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에서는 장인이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경제적으로 후원하여 보호해가고 있으나, 중국은 그렇지 못합니다.
저도 이 부분을 불만으로 생각하여 정부에 진정을 한 바 있습니다만 아무런 대답도 받지 못한 상황입니다. 중국의 전통지 중에서 ‘선지(宣紙)’는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내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여타의 종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상황입니다. 다른 전통지 공장 같은 경우는, 그 지방으로 여행을 오는 사람들에게 관광용품으로 팔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지방의 농민들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질 뿐입니다.
 | | 조병묵 강원대학교 교수 |
조병묵 : 선지에 관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선지의 기술을 외국인에게 열고 있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전통 기술의 유추를 방지하기 위한 국가적인 시책인지, 그렇지 않으면 지방정부의 보수성 때문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반치싱 : 중국 정부에서는 외국인에게 선지 공장을 개방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발행한 특별한 소개서를 갖고 있지 않는 이상에는 외국인은 절대로 선지 공장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도 이것을 우매한 정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이러한 정책을 펴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인의 경우, 중국의 선진기술을 자국으로 가져가 중국과 경쟁을 하려고 하는 심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 청 : 종이 발명이 중국에서 시작되어 세계로 전파되었다고 기록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접하여 가장 빨리 전래 되었으리라 봅니다. 낙랑고분에서 종이가 발견된 이래 우리나라에서도 종이를 만드는 작업이 삼국시대부터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반선생께서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종이제조를 언제로 보고 있습니까?
반치싱 : 제가 생각하기에는 기원 4세기 경에 중국의 제지기술이 한국으로 전래되어 대략 350년~390년 사이에 한국에서 최초의 제지공장이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구려 시대 말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백제에서도 제지공장이 나타났다고 봅니다.
 | | 김 청 월간포장 발행인 |
김 청 : 중국에서 이렇게 전해진 종이기술은 한국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만, 기록에 따르면 610년경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전에 이야기나눈 백제의 왕인이 405년에 일본에 갔으므로 왕인이 그 때 일본에 제지술을 전파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반치싱 : 저는 김선생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담징이 일본에 갔을 때 제지술을 전래했다고 추정해볼만한 기록은 ‘서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서기의 구체적인 기록을 보면 담징이 ‘종이를 만들 줄 안다’ 라고만 써있을 뿐이지, ‘만들었다’고 쓰여 있지는 않으므로, 일본 학자들도 이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610년보다는 더 위로 소급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왕인의 경우는 일본에서 무척 많은 활동을 하였고, 왕인의 자손까지도 일본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왕인의 경우, ‘고항집(古杭集)’에 종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습니다. ‘고항집’에는 왕인의 이름은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고 ‘화이길사(和爾吉師)’, ‘기사(記私, 技師, 寄師)’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사’가 바로 ‘왕인’입니다. 저는 대체적으로 왕인이 제지술을 일본에 전파시켰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왕인이라는 사람은 한반도에서 출생하여 자라 백제로 건너간 사람이지만, 족보를 따지자면 한 고조 유방의 후손으로서 중국 한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한국의 화교인 셈입니다. 왕인은 그 일생이 흥미로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부모는 중국인이므로, 중국이 하나의 고향인 동시에, 한국에서 태어났으므로 한국이 자신의 출생고향이고, 또한 일본에서 활동을 하였으므로 일본 또한 고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김순철 : 전남 영암군에 왕인이 책을 읽었다는 책굴이 있고 매년 왕인축제를 하고 있으나, 이것은 모두 일본 ‘서기(書記)’와 ‘고사기(古史記)’를 인용한 것뿐입니다. 다만 왕인을 ‘와니’라고 발음할 수 없는 것을 보면 ‘고지기’에서의 ‘화이길사’를 ‘와니’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족보를 추정하여 한나라 유방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설명이지요.
반치싱 : 왕인의 족보를 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왕란은 왕인의 조부가 되는 사람입니다. 왕인과 관련하여 일본에서는 여러 가지 이름이 등장합니다만, ‘와니’라는 말 또한 왕인을 나타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순철 : 그 고증이 중국에 있는 것입니까, 일본에 있는 것입니까?
반치싱 : 참고한 문헌은 일본에 있는 것입니다. 왕인의 선조가 한고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순철 : 일본 ‘서기’를 보면 먼저 일본에 가 있던 백제의 ‘아직기’에게 더 훌륭한 학자가 있느냐고 한 즉 ‘왕인’이란 학자가 있습니다라고 했지요. 그래서 왕인이 일본에 가서 일본 왕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 왕인이 왜한직(倭漢直)이라 해서 중국 계열이라고 하나, 일본에서 왜한직은 분명한 ‘성(姓)’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반치싱 : 왕인은 한인(漢人)이라고 기록된 바 있습니다. 왕인의 후손이 족보를 만든 바 있습니다만, ‘나의 선조는 한 고조이다’라고 쓴 바 있으므로, 이에 추론하여, 왕인의 선조가 한고조 유방의 후예라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지요. 기록 안의 ‘한직’이라는 글자는 일본에 있는 한인으로서의 비서라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일본의 호구책이라는 것을 보면 왕인은 한인이라고 기록된 바 있습니다.
김순철 : 저는 사실 문헌에 있는 것을 전부 신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생깁니다. 검증이 필요하지 않을 런지요. 예를 들어 선생님의 지난 논문의 경우,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성덕태자가 담징으로부터 닥나무에 의한 종이기술을 받아들였고, 그 까닭에 일본에 닥나무를 보급시킨 ‘일본 종이의 할아버지이다’ 라고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견해로는 성덕태자라는 인물이 있었느냐 라는 사실 자체도 문제제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반치싱 : 일본의 문헌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의 연고에 대한 오류도 있습니다. 문헌에 대해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사실을 검증하자면 중국자료, 일본자료, 한국자료 들을 모두 종합적으로 조사해야합니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이나 문화적인 배경들을 종합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성덕태자’와 관련하여 일본에서 과장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성덕태자에 관한 저의 견해는 성덕태자는 학자로 볼 수 있습니다. 학문에 조예도 깊었고, 서예도 잘하였으며, 독실한 불교신자인 동시에 불교와 유학, 한문도 능하였습니다. 이 분의 저작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김순철 :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역사책에 근거한 추론이 아닌지요?
반치싱 : 지금까지 제가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근거들입니다. 한국학자들이 여기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순철 : 그래서 제가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저는 성덕태자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 아닐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성덕태자는 김메이 천황의 4번째 왕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김메이천황은 아들이 열둘이 있었고,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스이코 천황입니다. 성덕태자는 4번째 왕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스이코 천황은 성덕태자의 고모가 됩니다. 또한 스이코 천황은 2번째 아들과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동시에 큰엄마도 됩니다.
그러므로 스이코 천황은 성덕태자의 고모인 동시에 큰엄마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기록에 따르자면, 이 성덕태자는 2살 때 장군이 되어 적군을 다 몰아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이코 천황을 섭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요? 그 당시에 중국을 방문한 일본의 사자(使者)는, 중국에 고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왕이 궁녀를 700명을 거느리고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이코 천황은 여자이기 때문에, 궁녀를 700명을 거느릴 리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태자에 관해서도 성덕태자란 이름이 없고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덕태자의 존재는 믿을만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일본의 역사왜곡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반치싱 : 일본학자들이 성덕태자의 이런 사실들을 과장해서 만들어놓은 역사를 오늘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면 성덕태자의 담징과의 관련된 부분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어야 하겠군요.
김순철 : 일본 학자들은 닥나무 제지술에 관해 성덕태자가 담징에게서 배워 보급되게 되었다고 보고 있고, 그것을 또한 그대로 인용하여 쓰셨습니다만, 저는 그 부분이 허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덕태자라는 인물 자체가 가공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무거운 얘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만, 저는 중국의 학자들이 너무 일본의 자료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대만의 학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만, 그 분은 고구려를 신라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의 제지역사에 관해 무지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중·일의 학자들이 함께 연구해 볼 부분들이 많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오늘 결론을 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래 건강하셔서 다음 기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지기공사 김순철 회장은...
전북공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北鮮製紙(현 世豊), 무림제지, 한국수출포장 등에서 오랜도록 제지 생산 현업에 종사해 왔으며, 상공부 지류전문위원회위원, 중소기업기술지도사, KS공장지정심의위원, ISO심의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Paper Machine(1969)’, ‘골판지의 제조이론과 응용(1979)’, ‘원료의 고해(1979)’, ‘종이의 제조이론과 응용(1985)’, ‘종이 이야기(1992)’, ‘골판지 기술(1997)’, ‘종이 역사(2001)’ 등이 있다.
국제종이역사학회(IPH) 회원이기도 한 김순철 회장은 종이역사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으며, 「월간 포장」의 ‘역사를 알자’ 코너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종이 역사에 대한 숨은 이야기들을 기고해 오고 있다.
중국과학원 반치싱 교수는...
대련이공대학 화학공정계와 북경화공학원을 졸업하고 중국과학원 자연과학사연구소 연구과학기술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펜실바니아대학교,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방문교수 등을 지내왔다.
주요 저서로는 ‘中國造紙技術史稿(1979)’, ‘中國製紙技術史(1980)’, ‘天工開物校注及硏究(1989)’, ‘中外科學之交流(1991)’, ‘中國科學技術史一造紙·印刷券(1998)’, ‘中國古代的四大發明(2002)’ 등과 수많은 발표논문이 있다.
반치싱 교수는 중국의 제지역사에서 채륜 이전에 제지를 만드는 기술이 존재해 왔다며, 이를 증명하는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다고 전한다. 중국에서도 그의 이론에 경계의 분위기도 있지만 제지역사에 관한 다양한 연구 활동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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